국민연금의 SK이노 합병 반대에…우군 없는 두산그룹도 '사정권'
입력 2024.08.23 07:00
    수탁위 두산 구조 개편 의결권 향방에 촉각
    수탁위 개최 여부는 "미확정"
    두산그룹 사안 중대성 고려해 논의 시작할 듯
    합병 비율 논란에 '주주가치 훼손' 적용 가능성도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국민연금의 선택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에 제동을 걸었는데, 분할·합병 비율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두산그룹의 의결권 방향도 유사한 방식으로 결정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단 평가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의 2대주주로, 사실상 국민연금의 결정에 따라 지배구조 개편의 성패가 판가름 나게 된다. 국민연금이 '주주가치 훼손'을 막기 위해 기업들에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서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성공도 장담하긴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평이다.

      아직까진 두산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행사를 어떤 방식으로 결정할지 확정하지 않은 상태로 파악된다. SK이노베이션의 주주총회를 5일 앞둔 상황에서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개최하고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로보틱스 등 주주총회는 내달 25일 열린다.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 그리고 사회적 논란이 예상되는 자본시장의 거래의 대부분은 수탁위에 의결권 행사 방향을 일임하기 때문에 조만간 내부적 논의를 거쳐 수탁위에 안건이 상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이번 사안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두산그룹 3사의 합병안과 관련해 수탁위를 개최할지 여부 등 확정된 사안이 없다"고 말했다.

      수탁위는 이번 SK이노베이션에 합병에 반대를 결정한 표면상 이유는 ‘주주가치 훼손’이다. 수탁위위원들 간 의견이 다소 엇갈지만, 합병 비율 등을 두고 논의를 이어가면서 장기적으로 합병으로 인해 주주가치가 훼손할 수 있단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수탁위 개최에 앞서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들이 '찬성'을 권고했고, 실제로 해외 연기금(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 CalPERS, 캘리포니아교직원연금; CalSTRS)들이 찬성표를 행사했기 때문에 수탁위의 이번 결정은 외부의 변수와 상관없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기업을 향해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면서 분할·합병 비율 등을 두고 더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횟수에 상관없이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며 압박했고, 국회에선 일명 '두산밥캣 방지법'을 발의해 합병 비율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의 2대주주(6.8%)이다. 지분율로만 따진다면 국민연금이 반대해도 일반주주들이 동의한다면 주주총회 안건 통과 가능성이 열려있지만 관건은 주식매수청구 규모이다.

      현재 두산에너빌리티의 주식매수청구 규모 상한은 6000억원이다.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가치만 시가 기준(8월22일 종가 1만7760원) 7700억원으로 매수 청구 규모의 상한선을 훌쩍 넘는다.

      즉 국민연금 수탁위에서 반대 의결권 행사를 결정하는 순간 두산에너빌리티의 인적분할이 무산되고 뒤이어 계획된 신설회사의 두산로보틱스와 합병,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주식교환 등이 중단된다. 물론 두산에너빌리티가 주식매수청구 규모의 상한선을 더 높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경우 막대한 현금 지출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긴 어렵단 평가가 나온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의 가장 오래된 투자자 중 한 곳이다. 2013년부터 5~8% 내외의 지분율을 유지하고 있다. 원전사업의 불확실성으로 두산에너빌리티의 성장성에 의구심이 제기될 당시에도 2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유상증자에 참여했고 지분율을 유지했다. 다만 두산에너빌리티의 기업가치는 10년전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국민연금이 두산에너빌리티에 대한 투자로 얻은 이익이 크진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두산그룹이 국민연금의 찬성표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두산에너빌리티 분할, 즉 두산밥캣을 떼어낸 이후 긍정적인 효과가 명확히 제시돼야 한다.

      두산밥캣은 그룹의 핵심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주가는 수년째 제자리 걸음하고 있다. 합병 대상인 두산로보틱스는 적자기업이지만 두산밥캣보다 시가총액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에 시가를 기준으로 한 분할·합병에 ‘주주가치 훼손’의 논란이 일었다. 이를 이유로 금융권 단체들이 지배구조 개편에 공개적으로 비판에 나섰고 주주들이 연대해 주주명부를 공개하라며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이 찬성 표결을 확정하는데 상당한 부담이 따를 것이란 평가와 함께 SK이노베이션 사례와 마찬가지로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반대표 행사를 결정할 가능성도 거론되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