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은 '밸류업 지수'에 연이어 동원되는 연기금·공제회
입력 2024.09.25 07:00
    거래소, 24일 장 마감 후 밸류업 지수 발표
    연기금·공제회, 밸류업 발맞춰 운용사 선정
    "기관 의존 말고 기업가치↑ 본질 집중해야"
    공시 기업 1.5% 불과…성장 동력 상실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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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거래소가 'KRX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발표했다. 밸류업 지수는 수익성과 주주환원 등 기준을 충족한 기업들 중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높은 상장사 100종목으로 구성됐는데, 연내 이 지수를 추종하는 ETF 출시도 예정돼 있다. 다만 기업들의 밸류업 공시 참여도가 저조해 의미가 퇴색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금융당국은 밸류업 프로그램의 흥행에 있어 연기금과 공제회 등 기관투자가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나섰다. 선제적으로 밸류업을 공시한 기업들의 주가 상승폭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며 시장의 의구심이 커지자, 당국이 밸류업 홍보에 기관의 자금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9일 공무원연금공단은 2019년 이후 5년만에 국내주식형 신규 위탁운용사 선정 계획을 공고했다. 2개 운용사를 선정해 총 400억원을 위탁할 예정이다. 공무원연금은 밸류업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주주환원에 초점을 맞춰 운용사를 선정하겠다고 밝혔는데, 사실상 당국이 추진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평가다.

      국민연금공단 또한 한국거래소가 밸류업 지수를 발표한 24일, 하반기 국내주식 위탁운용사 선정에 착수했다. 장기성장형과 책임투자형 2개 부문에 총 4개사 이내를 선정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국민연금은 올 상반기 수익성을 이유로 선정을 잠정 중단했던 가치형 국내 주식 운용사도 8년 만에 선정한 바 있다. 군인공제회 역시 지난 5월 국내 주식형 펀드 위탁운용사를 선정했는데, 밸류업 프로그램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주요 선정 기준이었다.

      밸류업 지수가 공개되었지만 시장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이에 밸류업 흥행을 위한 금융당국의 연기금 및 공제회 의존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가 100종목으로 지수를 구성한 것도 그 이하로 지수를 구성할 경우 유동성 문제로 연기금 등의 대규모 자금 유입이 제약될 우려 때문이었다.

      금융당국은 최근 밸류업 지수에서의 기관투자가 역할론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달 12일에도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열린 토론'에 참석해 일본의 공적연금(GPIF) 사례를 들어 국내 주식 시장의 저평가 해소와 밸류업 정책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국민연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무작정 국내주식 투자 비중을 높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비중을 현 수준으로 유지할 경우 2040년 이후 기금 감소기에 돌입했을 때 연간 수십조원 수준의 매도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이 최근 개혁안을 발표하며 해외투자 역량을 강화하기로 한 이유다.

      이에 당국이 밸류업 흥행에 있어 기관의 자금력에만 의존할 것이 아닌, 기업가치 제고의 본질에 집중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밸류업 지수가 공개됐지만, 밸류업 공시를 한 기업의 수가 적다 보니 성장 기대주를 다수 편입시키며 본래의 취지를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현재까지 예고 공시를 포함해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한 상장사는 코스피와 코스닥을 포함해 40곳에 불과하다. 이는 전체 2586개에 달하는 공시 대상 상장사의 1.5%에 불과한 수치다. 물론 밸류업 공시를 한 상장사만으로 지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의 참여율이 저조하면 밸류업 지수 자체의 성장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증권가에서도 밸류업 지수가 후행 지표인 만큼 단기간 주가 부양을 크게 끌어낼 장치가 아니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밸류업 기업들이 이미 많이 알려져서 오히려 밸류업 지수 발표 자체가 단기 모멘텀의 일단락으로 볼 여지도 있다"며 "주가에 플러스보다는 중립 정도의 이벤트로 본다"고 평가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밸류업 지수를 추종하는 ETF가 나오더라도 기상장된 ETF와 차별화된 점이 뚜렷할 것 같지도 않고, 밸류업 ETF를 살 바에는 밸류업 공시 참여율이 높은 금융지주 ETF를 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온다"라고 말했다.